박스하나로 첫번째 이야기
박스하나로는 택배 상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하루에서, 가장 조용한 1시간을 포장해 주는 작은 의식이었다.
연탄 돌멩이는 매일 밤, 화면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줍고 있었다. “답답해요.” “괜찮은 척 지쳤어요.” “아무 이유 없이 무너져요.” 글들은 짧았지만, 그 뒤에 눌러 담긴 숨이 길었다. 그는 생각했다. 위로는 거창한 말이 아니라,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허락에서 시작된다고.
어느 날, ‘하로’가 나타났다. 늘 같은 베이지 톤 옷, 다크 브라운 머리, 바람처럼 잔잔한 표정. 하로는 말 대신 박스를 들고 있었다. 박스에는 조용히 적혀 있었다. boxhanaro.
“이건 무엇을 담는 거야?” 누군가 물으면 하로는 미소로 답했다. “당신이 오늘 잃어버린 당신.”
박스를 열면 양초가 있었다. 불꽃은 시끄러운 생각을 아주 조금씩 태웠다. 티백은 뜨거운 물 속에서 천천히 풀리며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맛을 만들었다. 온열안대는 눈꺼풀 뒤에서 바쁜 세상을 닫아 주었다. 그리고 음악. 마치 숲의 아침처럼, 물기 맺힌 공기처럼, 마음의 결을 따라 흘러왔다.
하로가 가장 좋아하는 기능은 ‘공유’ 버튼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이 세상으로 나갈 때, 그것은 “약해졌다”가 아니라 “용기”가 됐다. 또 어떤 날엔, 그 버튼을 ‘회수’로 눌러도 괜찮았다. 마음은 공개가 아니라 안전이 먼저였으니까.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박스하나로에 기록된 마음들이, 서로의 하루를 조금씩 붙잡아 주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나만 이런 줄 알았는데”라고 적었고, 누군가는 “당신 글 덕분에 오늘 숨 쉬었어요”라고 답했다.
연탄 돌멩이는 새벽에 창을 열었다. 도시가 아직 잠든 시간, 그는 조용히 웃었다. 박스하나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1시간을 구한다면—그건 충분히 큰 변화였다.
새벽 공기는 얇고 차가웠다. 연탄 돌멩이는 모니터 밝기를 한 칸 낮추고, 박스하나로의 “베스트 마음노트”를 열었다. 거기엔 화려한 문장이 없었다. 대신, 오래 버틴 사람들만 남기는 특유의 담백함이 있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해결 못 했어요. 그래도… 버티긴 했어요.”
그 아래 댓글은 짧았다.
“그럼 오늘은 성공이에요.”
연탄 돌멩이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관리자 화면에서 작은 설정 하나를 만들었다. 공유/회수 버튼 옆에 아주 작은 글씨로.
“지금은 나만의 안전한 방이에요.”
“지금은 함께 나누는 중이에요.”
말을 바꾸면 마음이 바뀐다. 최소한, 마음이 걸어 들어오는 문턱은 낮아진다. 그는 그걸 믿었다.
그날 밤, 하로는 박스를 들고 또 다른 방에 서 있었다. 이번 박스는 조금 달랐다. 박스 안에는 “좋은 글귀” 대신 빈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하로가 종이를 꺼내 책상 위에 놓자, 종이는 천천히 글씨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의 속마음이 손끝을 찾아온 것처럼.
“나는 가끔, 아무 이유 없이 울고 싶다.”
하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음은 때때로, 이유를 붙잡지 못한 채로도 무겁다. 중요한 건, 그 무게를 혼자만 들지 않는 일이었다.
하로는 조용히 음악을 틀었다. 대금과 바이올린이 섞인, 숲의 아침 같은 선율. 그리고 화면 한쪽에서 작은 초록 점이 깜빡였다. 누군가가 새 글을 올렸다는 신호였다.
연탄 돌멩이는 마우스를 움직이다가 멈췄다.
이번엔 누가, 어떤 1시간을 필요로 할까.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박스하나로에는 분명한 규칙이 하나 있었다.
당신의 마음은, 처리 중 오류가 아니다.
천천히, 안전하게, 다시 저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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